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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서진을 알게된 것은 벌써 거의 10년 전이다. 그가 운영하는 한페이지단편소설 (줄여서 한단설)에 첫 글을 올린 것이 2006년이었고 지금이 벌써 2015년이니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냥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서 누군가가 시키지 않아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스물 한 살에 몹시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글을 열심히 올리고 댓글을 주고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힐링이 되었던 것 같다. 닉네임을 무려 세이지로 정한 것도, 우울증에는 허브 중 세이지가 좋다는 말 때문에 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에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 나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그들의 글을 보면서 또 즐거웠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에서 2년 정도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하다가 나는 소설을 쓰기에는 환상적인 세계든, 아니면 일상적이어도 모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세계든 간에 그 모든 걸 완성시킬 정도의 능력은 무척이나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떤 세계를 완성하는 것보다 만들어진 세계에 감탄하거나 일상의 감정이나 관찰한 사항을 구구절절 자세히 쓰는 것을 좋아하지, 소설을 완성하는데 큰 재능이 없음을 알게 됐고 흥미도 점차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한창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다시 내 20대 "초"초반에 가장 근사했던 공간 중 하나인 한단설에 들어가 봤더니, 아직도 누군가는 글을 쓰고 있었다. 거의 예전모습 그대로 말이다. 그러다가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서진이 올해 초에 내놓은 에세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전부터 알던 사람(?!)이라 친근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목차나 일부 내용을 보니 내가 꼭 읽어야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내가 접했던 한단설의 수장 서진은 몹시나 차도남스러운 남자였다. 한단설 홈페이지의 모양새도 그렇고, 그 안에서의 일처리하며, 어딘가 약간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아마도 그건 정말 차도남이라기 보다는 어느 정도 부산 남자의 정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서진이란 인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뒤늦게 많은 방황 끝에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줄 몰랐다. 별 일 없이 순탄하게 소설가가 된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소설가가 되기 전, 되고 나서 했던 생각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가장 공감이 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해서, 혹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에 세상은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막상 안정적인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막상 좋고 편한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걸 하게 된다고 해도 상상해서 떠올리는 것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인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요즘까지도 돈키호테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면 큰 일이 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서야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언제나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저 최악의 상황을 피해서 열심히 산 것이지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 자체를 거의 '죄'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저번에 김정운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책에서도 그렇고, 20대를 다 보내고 나서 30대를 시작하면서 계속 '행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10대-20대를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열심히 살아왔고 그러면 저절로 많이 행복해 질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은 행복해지지 않은 것만 같다. 그것이 내가 행복의 기준이 너무 높아 욕심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인생을 열심히 살기는 했으나 제대로 살지는 못한 것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하나, 나는 열심히는 살았으나 정말로 '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가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던 건 맞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이전에 누군가가 서진의 소설을 보고 '소설가를 할 정도로 재능이 있지는 않은 것 같네'라고 얘기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와는 상관 없이, '재능이 있든 없는 상관 없이 그냥 원하는 걸 네 맘대로 하면 돼!'라는 확답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잘' 하려고 애를 써왔다. 내가 실제 잘 할 수 있는지 잘 할 수 없는지와는 상관 없이 '용'을 썼다. 나도 모르게 모두가 말 하듯이 안정적인 게 아니면, 잘 하는 게 아니면 생각 조차 하지 말라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인가를 잘 하지 못한 다는 것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고, 결국 그런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정'이 기준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이 말을 통해 깨달은 것 같다. 내가 단순히 나이의 앞이 3으로 바뀌어서 요새 계속 나도 모르게 압박감을 받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내 삶이 끝나는 순간이 오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보았는지 질문했을 때 '그렇다'라고 후손에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

이전에는 성공=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게 많았는데, 앞으로는 성공보다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지' 깊이 궁리하며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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