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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8점
김정운 지음/21세기북스(북이십일)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실로 백만년만에 책을 하나 읽은 것 같다. 본격적인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말하기 전에, 책을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읽지 않았기에 책 읽는 방법을 까먹진 않았을까 했는데 그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줘서 나에겐 다행이라는 감정을 쥐여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인터넷에서 읽게 된 기사 하나 덕분이다. 이 책의 저자가 교수를 하다가 그만두고 순전히 행복하기 위해 일본에 가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를 본 건 꽤 오래전 일이지만 내 머리를 '탁'하고 치는 것 같은 무언가가 있었고,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 책을 보게된 것이었다.


주의요망-책 제목에 낚이지 말 것

그 기사도 기사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 책의 저자가 힐링캠프에서 의례적으로 방송의 재미를 위해 할 수 있는 정도의 것보다 더 많은 정도의 난 체를 하는 걸 거리낌 없이 하는 걸 보았기에, 그 전에도 많이 배웠다고 널리 일컬어지는 분들 중에 그런 스타일의 분들을 본 적은 있었으나, 이 도발적인 제목아래서 이 분은 무엇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래서 이 제목을 보고 '이 아저씨가 뭘 그렇게 그럴싸하게 쓰려고 노력했는지 한 번 두고 보자'는 식의, 결전을 앞두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는 축구 선수의 마음을 지닌 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대감은 첫 페이지부터 거의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긴 하는데, 가끔 후회한다나. 무언가와의 결전을 노렸던 내 마음이 '갑자기 이게 뭔가'하는 생각에 갇혀버렸다. 무엇보다 이 책을 전체 다 읽어보니 솔직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난 체는 많지 않아 방송에서 보았던 모습은 잘난 척 코스프레에 소질이 있었던 걸로 결론 내렸다.

이 책은 결혼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왜 이 시대의 중년 남성들이 모든 것에서 행복하지 못한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한 설명서 같다. 철학적인 내용도 잘 버무렸지만 여러 철학적인 용어들은 궁극적으로 한 가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왜 중년 남성들이 이해하기 힘든 몇 가지 모습을 띄게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금' 행복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여러 고찰을 내놓은 책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결혼의 부당함이라든지,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이다. 제목을 보고 현대 사회에서 결혼이 가지는 의미와 어떻게 훌륭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다른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솔직함이 가진 매력

이 책에서는 저자의 지인들의 실명을 굳이 숨기지 않고, 그들과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필터링 없이 이어진다. '아, 이런 얘기까지 다 하실 거 있나'하는 생각이 아예 안 든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이 책에 들어가면서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중년 남성들의 여러 특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라고 부담스럽게 세뇌시키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그것만을 노린 건 아닌 것 같지만, 아마 내 또래의 부모 세대를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는 건 이 책이 가진 큰 매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에 대한 담론-행복에 대하여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제일 좋았던 것이 내가 조금 더 행복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20대 초반에, 아니 심지어 고등학교 때에도 자기계발서를 끊임없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도 행복해졌던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예전에 이 블로그에도 남겼던 글처럼 자기계발서에는 성공의 열쇠가 아닌 누구나처럼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자신의 성공담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살고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세상에서, 저자는 '지금이 행복한가?'라는 조금은 동떨어진 질문을 한다.
나는 여태까지 현재가 행복한 적이 없었다. 미래에는 떨어지는 현재 대신 그 모든 것을 채워줄 미래에서 행복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에 가면 행복할 지 알았고, 대학교에서는 원하는 직장에 가면 행복할 지 알았고, 직장에 가고 나서는 열심히 일하고 나중이 되면 행복할 줄 알았고,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이건 나만 겪어왔던 생각의 고리는 아닐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놀면서도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무언가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논다. 문제는 이것이다 논다는 것이나 즐긴다는 것에 대해서 인색하고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일하고 노는 건 나중으로 미뤄놓기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현재에 즐겁기 위해 노력했던 건 무엇이 있나하고 곰곰히 따져보니, 게임하고 그랬던 것 말고 즐기기 위해 했던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블로그의 경우, 이 블로그를 아주 마냥 즐기면서 했다면 이렇게 계속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블로그는 무엇인가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압박감에 계속하는 것이 재미보다도 더 큰 무게를 갖고 있다.)

문제는, 게임이든 아주 사소한 것을 하면서도 그 때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요새 마음이 그렇게 맑지만은 않은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모두가 원인이 미래에 내가 바라는 무언가가 영영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놓이고,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부터 행복할 생각을 어렸을때부터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살아오면서 왜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은가 생각했더니, 나는 내가 잘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어도 행복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지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 한 권으로 내가 바로 성자가 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행복을 위해 외적으로 보이는 요소에 많은 신경을 쓴다. 하지만 확실히 행복과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는 외적인 성공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성공만을 위해서 거칠 것 없이 달려가기보다 내 자신이 지금부터 행복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노는 것 마저도 마음껏 놀지 못하고 놀때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아직도 우리 나라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엄숙함이 벗겨져 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냥 가벼운 것이 한없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놀지 못하면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그 생각마저 짓눌려져 사라져 버린다면 그렇게 사랑해마지 않는 밝고 희망차고 행복한 '미래'마저 위태롭지 않겠나 하는 걱정이 슬쩍든다.

나도 얼마나 실천할지 자신은 없지만 현재의 행복을 위해 이제 더 이상 현재를 희생하는 일은 좀 더 줄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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