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개밥바라기별 - 10점
황석영 지음/문학동네



어른아이를 위한 성장소설

 외국에는 성장소설이 무척이나 많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A.J.크로닌의 고독과 순결의 노래 등 정말 많이 있다. 때로는 그들의 소설을 보며 공감하고, 어지러운 삶을 지탱하기로 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다 보니 전부를 공감하긴 어려웠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이젠 더 이상 성장소설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꼭 성장 소설이 아니더라도 음악을 듣든 책을 읽든 간에 감정을 소비하는데 조금 지쳐있었다. 감정을 소비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아직도 어른 운운할 만큼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십년 전 소년에게서 느낀 동질감

 참 이상한 것은 학력고사가 수능으로 달라진 것과 그래도 벽에다가 전체 등수 붙이는 것 빼고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도 지금도 모범생은 모범생대로, 날라리는 날라리대로 자기 길을 가고 아직도 예전처럼 젊은이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어른들도 그대로다.

 우리는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왔다.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던 것은 좋은 미래를 위해 달려온 것일텐데, 왜 아직도 몇십 년전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직도 공부는 대학과 연결되고 좋은 학벌은 직업과 연결되어있다. 이 연결고리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아마도 예전의 시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공감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이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어린 청소년이라고 해도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배우는 지성인으로서 무시받지는 않았다는데 요새는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새 장기판의 말일 뿐 아무리 개성이 많다고 해도 그 안에서만의 조그만 자유 비슷한 틀 내에서 거주하는 듯하다.

 달라 보여도 청소년은 예전이든 지금이든 허세와 객기도 가지고 있다. 요새는 특히 이러한 감성이 중2병으로 대표되기도 하지만, 누구나 청소년이라면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대세인 쪽에서 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바라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두드러지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런 길에 대해 혐오하고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 시키려는 것이다. 이 둘 다 결국은 청소년을 가끔은 무모하고 위험한 결과로 귀결시킨다.

 가끔 나도 그런 성미를 버리지 못한 것 같아서 괜히 계속 반성하기도 하지만 젊었을 때 그런 마음 하나도 없이 교과서대로, 인형처럼 사는 것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청소년이라면 당연히 이런 것도 충분히 겪어야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고, 과거의 경험을 통해 더 성숙하게 되는 것 아닐까?


과거의 소년, 소녀와 현재의 소년, 소녀

 그래도 예전에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보다 더 분위기가 위험했는데도 말이다. 비록 몇 가지 면에서 그렇게 단순히 무시할 만큼은 아니라는 게 어느 정도 밝혀지긴 했지만, 우리는 개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고서야 쉽게 나서지 못한다.

 왜 현재의 소년 소녀들은 이렇게 소심해진 것일까? 그러다보니 가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예전보다 평균 이상으로 지식도 많아지고 교육도 높아지고 했다는데 성장이 멈춘 채로 머릿 속에 글자만 잔뜩 채운 아이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본의 아니게 맞춰서 살려다보니 반항심이나 의기를 거세 당한 듯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

 무슨 말이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난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회사에서도 뛰어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과 잘 적응하고 산다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자라지 않은 채로 결혼을 했기에 회피만 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산다고 말이다. 남자가 아니라도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도 단순한 목표만 생각하고 깊이 경험하고 생각하지 않다보니 결혼하고 나서 실제의 벽과 부딪치게 되고 자신의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너무 삼천포인가) 사람들이 너무 성공에 대한 강박과 성공적인 자신의 삶에 대한 과도한 믿음으로 삶의 다른  요인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최선의 경우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나면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다들 성공만 알고 성장은 모른다. 사실 성공만 바라보기에 성장할 시간이 없다. 성공하기만 바랄 뿐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 성공을 위한 발걸음 외에 다른 것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예술에 대한 관심이라고 치면 깊이 받아들이기 보다는 단순한 지식이나 상식으로 받아들이며 겉치레로 알고 장식품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성공했는데 모른다고 하면 괜히 이미지에 금이 가니까 말이다.


자기 반성의 시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은 다 해놓았건만 결국 큰 문제는 나도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성공만을 위해 달려왔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에서 보면 꼭 그런 경우가 있다고 했다. 방황하는 녀석들을 재밌게 보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결코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결국은 그 녀석들은 길을 틀지 않고 자기 길을 갈 뿐이라고 말이다.

 이 소설이 그리 어려운 소설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맞이한 인생의 순간이 순간이니만큼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이 소설을 보고 나도 성공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달려가야한다는 요즘의 트렌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승자'를 위한 드라마를 보는데 별 생각없이 즐겼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한 시간은 그 시간 자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텐데 요즘은 드라마든 입지전적인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든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 성공을 위한 도구나 돋보이게 만드는 일화 정도로, 혹은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에 불과한 것 같다. 왜 이제서야 내 어린 시절이 불완전했기에 참 아름다웠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내 어린 시절이 다른 사람에 비해 혹독하지 못했던가 반성만 했기에 나는 자랄 수가 없었나보다.

직접 그려본 별(by 세이지)


시작

 유준과 나는 같은 스타트 라인에 서있다. 나도 그도 다른 시간에서 평행하게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말을 해놓고도 나는 아직도 그저 물질, 숫자로 표현되는 성공을 쫓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탓에 괜히 쿡쿡 찔린다. 아마 이렇게 길게 써놓긴 했지만 전부를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괜한 다짐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하고 못하는 것은 인정하고 싶다.

 이 글이 단지 아직 덜 자라서 나오는 허세나 중2병의 증상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준과 나를 같은 선상에 두었다고 했지만 유준에 비하면 현재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야 조금은 더 성장한 느낌이다.



너희들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네가 다른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금성이 새벽에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 부른다고 한다. 즉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 작가의 말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