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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 취직 때문에 다면적 인성검사(MMPI-2)를 할 기회가 있었다. 500문항이 넘어가는 문항들에 ‘예’, ‘아니오’를 답하고 있자니 나중에는 급한 마음이 들어 나는 그냥저냥 채우고 가야지 했다.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다.’

 ‘나는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따위에는 쉽게 답을 하던 나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나와 검사지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 검사지의 검증된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검사지를 만든 사람은 아마도 단순하게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문항을 집어넣은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이 문항에 아니라고 답했다고 해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다’에 ‘아니오’라고 답한 그 순간에, 남들이 다 보라고 지껄이는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나 혼자서 쓰고, 보는 일기장에 써 놓은 그 많은 고민과 불만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품었던 잡다한 애증의 덩어리를 내 스스로 잘라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멈추었던 건, 그 순간에는 이유를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감정의 카오스에 파묻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내 생애 중에 몇 년을 달려도 달려도 답 따위는 실마리도 보이지도 않던 길에서 헤매는데 보냈는데 단 한 문장으로 인해 절여진 감성이 아닌 내 자신을 마주하고는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놀랍게도 ‘실패하지 않은 인생이었던 것’이다. 몇 년을 심각한 척 하며 나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지만 그건 정말 원초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인가 알아가는 것 같았지만 입안에서 어른거릴 뿐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자신은 없었는데 이제야 알게 됐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누군가가 나에게 비웃음을 보낸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성공했다’보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발견한 것이 훨씬 소중하다.

 실패에 대항한 성공만을 향해서 달려가겠다는 게 아니다. 인생의 한 방향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도 같은 질문이 내게 다시 다가왔을 때는 단순한 성공 때문이 아니라, 내 삶을 돌아봤을 때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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