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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다 똑같이 체크무늬로 된 교복을 입은 학생은 나를 슬프게 한다. 처량한 나뭇가지 위에 바람이 걸려 있는 모습은 나를 슬프게 한다. 너무 맑은 날, 하늘이 고요하고 드높아 나를 부르는데 나는 그와 마주앉아 얘기조차 나누지 못한 채로 검은 칠판에 드리워진 흰 그림자만 바라보아야 할 때.
 
 토요일에 아무 약속이 없는데 봄날처럼 따뜻할 때. 하늘이 잔뜩 찌푸린 어느 겨울날, 우리들의 바람대로 눈이 우리 앞을 가리지 않을 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정지용의 시, 휘성의 노래.
 
 마음은 시린데 눈물이 나지 않을 때. 사람이란 유한한 것이란 것을 깨닫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지만 막상 의지하고 기댈 곳이 없을 때. 졸업 앨범에서, “그녀는 나의 친한 친구였지….” 이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 안타까운 친구의 모습을 볼 때. 그래서 졸업 앨범을 보지 못하는 내가 불쌍하게 느껴질 때.
 
 내 자신이 태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오히려 태만한 것보다 못한 것처럼 느껴졌을 때. 즐겁지도 않은데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날 슬프게 한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나를 발견했을 때. 내 자신조차 나를 속이고 있을 때. 어린 날의 일기를 보며, 그 때에는 그렇게 소중한 기억이었는데 지금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날 슬프게 한다.

 집으로 돌아올 때, 어둠으로 막혀버린 길을 차가운 공기에 나를 맞대며 홀로 걸어가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내일 아침까지 눈을 뜨지 않고 싶은데, 매일 아침 어떻게든 일어나야하는 초라한 내 자신을 느낄 때.
 
 누군가 내 앞에서 피아노를 칠 때. 난 피아노를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없을 때. 나에겐 라디오 하나의 여유마저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세상을 혐오하면서도, 그 세상에 나를 맞추며 살아가려고 하는 나의 처참한 모습을 깨달을 때. 내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신 분이, 우리에게는 모든 걸 양보하시면서, 자신은 굳이 어려운 것을 택하실 때. 내가 그녀에게서 가져 온 만큼 그녀처럼 되지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와 같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한심한 존재들을 바라볼 때.

 눈물조차도 슬픔을 가져갈 수 없을 때. 사랑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때로는 내 마음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것.

 건물을 조그맣게 가리고 있든 크게 삼키고 있든 별것도 아닌 낙서를 볼 때. 바보라고 써 놓은 탓에 바보가 되어버린 책상.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금색 10원 짜리 동전 한개. 다 닳아져 쓰지 못하는 몽당비. 팥이 예전보다 줄어져버린 호빵. 맛있지만 마시지 못하는 콜라. 열을 내려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소리를 내야 열을 낼 수 있는 난로. 창을 열어줘도 자기 앞만 보고 머리만 부딪히는 조그만 새. 어느 공사장, 남은 자재들로 피운 모닥불. 진한 화장으로 감춰진 중년 여자의 모습. 어느 영하로 내려간 추운 겨울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목걸이 속으로 들어가 있는 네잎클로버. 잊고 있었던 환한 미소를 담은 어린 시절의 사진. - 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고등학교 때 쓴 거 다시 보니 재밌네.
안톤 슈낙의 글을 바꿔보라고 하는 과제때문에 쓴 거 였는데.
지금도 이런 것들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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