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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라는 책을 읽으면서 뜨악했었다.

 ‘이렇게 재밌는 책이 있다니!’

 그렇지만 그랬던 만큼 다 읽고 난 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뒤 끝에 한참동안 푹 적셔진 느낌이었다. 그건 결말이 별로이기 때문에 느끼는 배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읽는 내내 지속되었던 긴장감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읽을 때는 장편의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지 ‘메모’나 ‘단상’ 정도라는 그의 생각들에 대해 감탄하기 바빴다.

 이번 파피용을 보고 나서는 ‘뇌’를 읽었을 때와 ‘나무’를 읽었을 때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섞어놓은 것 같다.

 이 책도 역시 내용 면에서 신선하고, 냉철한 통찰력도 있고 군데군데에는 심오함도 돋보인다. 뇌와는 달리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구조도 단순하고, 어려운 해부학적 용어를 써서 묘사를 한 장면도 없다. 한 마디로 예전보다는 힘이 빠진 느낌이다. 나에게는 오히려 그런 면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 같은 분위기가 짙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국면을 맞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만 살았지 크나큰 식견을 가진 인물은 못 되어놔서 결과 자체보다도 그에 관계된 부가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쏟을 때가 있다. 앞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네, 어쩌네 하는 것도 내가 읽은 이 책보다도 이 책을 쓴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예측컨대, 아마도 베르베르는 확실히 삐딱선을 탄 남자다. 나도 알고 보면 삐딱한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인정도 받고 한 사람인데, 우리가 말하는 소위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그는 희한하게도 우리가 바라보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에 대한 묘사를 보여준다. (사실, 그 이상이다.)

 그리고 내가 볼 때에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다. 아닌 척 하지만, 중간에 사틴도 그렇고, 계속 총명하다가 단 둘밖에 없는 세계에서 급작스럽게 사랑 타령하는 엘리자베트도 그렇고, 항상 결정적으로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여자니, 원. 내가 아는 지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도 그렇고(이건 내가 본 적이 없어서 그녀의 견해가 맞는지 모르겠다) ‘색, 계’에서도 그렇고 여자는 중요한 때에 사랑이나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다 그르치는 것으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맨 마지막으로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그의 식으로 해석한 것도 참 놀랍다. 내가 보기엔, 그는 외로움 + 본능 때문에 아이를 만들어낸 것 아닌가해서 말이다.

 사실 이것에 대해서는 약간 서운한 것일 뿐이다. 내 입장에서 글을 쓴다면 나 또한 나도 모르게 내 중심으로 쓰게 될 테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영화 혹성탈출이 생각났다. 묻혀있는 자유의 여신상 하나로 ‘여기는 다른 곳이 아닌 지구다’를 보여주던 그 영화. 물론 나의 예상은 약간 빗겨났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지금의 우리가 책에서 나오는 그러한 여정을 통해 최후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영화 혹성탈출만큼 충격적인 방법으로 알려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 당신 잘났어요! 언젠가 빛으로 움직이는 우주 범선이 나오면 그 배 이름도 파피용이 되겠네요, 흥! 그러려고 이 책 쓴 거죠? 맞죠? 갑자기 쥘 베른이 부러웠나….”

 내가 이런 말을 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냥 웃고 말지, 정색하며 ‘무슨 쥘 베른이야’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미 인정을 받을 대로 받은 작가라는 얘기다.

 그런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나서의 느낌이 드는 것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단지 내 취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자의 관점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장인처럼 글을 다듬고 완벽하게 짜맞추어낸다. 결국 그 가상의 세계는 완전해서 깨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fact 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이라 이것저것 헬렐레 하고 모자라더라도 감정을 콕콕하고 쑤시기만 하면 ‘아, 좋아!’하고 여겨버린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뒷맛을 쩝쩝 다시는 것은 이 책에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같은 면을 찾으려는 바보스러움 때문이다. 일부러 감동을 요구하는 책은 싫지만, 쉽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예전에는 일렉트로니카의 전자음에 환호했지만 가면 갈수록 촌스럽고 폼 잡는 것 같아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진한 음악이 좋아지는 현재 내 마음 상태 때문에 괜히 트집을 잡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어떡하겠나. 다시 그의 세계가 좋아질 때까지 멀리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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