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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갈 수록 놀라운 것이 사람은 참으로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내가 어떻게 행동했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게 된다. 그나마 내가 이런 것들에 대해 양심에 가책을 받는 것은 그 동안 블로그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일기도 많이 썼던 편이라서 그걸 모두 갖고 다니면서 봤다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겠지만, 그나마 스무 살 무렵부터 거의 빼놓지 않고 블로그를 썼던 편이라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끔 다시 살펴보며 나도 모르게 각인이 되어서 조금 그나마 조심스러울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반성 및 변화를 100%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꼰대"스러움이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보면 필요 이상으로 설명하고 알려주는 것을 좋아했던 걸 보면 이런 건 아마 이미 예정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무려 지금 이 블로그도 보면 '이리이리 하면 잘 될 수 있느니라'스러운 글들이 매우 많다! 아니, 어쩌면 이 블로그 자체가 그런 목적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방명록이나 댓글에도 '이리해라, 저리해라'하는 글이 엄청나게 많다.


나는 글을 쓰면서 항상 이것은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고도 이것은 단지 내 생각일 뿐 임상시험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전혀 콧방귀 뀔 내용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핑계고 매우 내가 알고 있는 답의 범위가 크지 않기에 답을 제시한 사항도 매우 일방적이다.


그 동안 어떤 질문이 생기면 필요 이상으로 알려주면서 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부턴가 남들이 묻지 않은 것도 내가 "이게 답이야"라는 뉘앙스의 말을 계속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바로 나만의 답일지도 모르는 것을 '너에게도 답'이라고 나도 모르게 계속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남들이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놓고는 죄다 옳다/그르다로 나누어 판별하고 있었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 중 '그르다'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말하고 있으면 겉표정은 변화하지 않아도 속으로 엄청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나에게도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생각이 생긴 것이고, 잘 살펴보면 실제로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내 생각이 맞고 네 생각은 틀려'라고 말하는 꼰대 정신의 정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남들에게 뭐라고 하고 싶어도 되도록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선지는 몰라도, 아직 대놓고 '너 왜 그렇게 꼰대같이 얘기하냐'라는 말은 못 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냥 내색을 하지 않아선지 내 말을 참고할 대상 정도로는 여기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이대로 계속 유지한다면 대놓고 꼰대 소리 들을 날도 멀지 않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꼰대가 뭐 별 것이냐, 나이 먹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나에게는 정말 큰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생의 목표가 비록 순수함은 간직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서 느꼈던 그 피곤함은 가져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격이나 습관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다.


나에게 꼰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중요하고 특히 아랫사람의 경우 더욱 더 존중하지 않고, 참견할 것이며 참견한 대로 하지 않는 경우 나도 모르게 괘씸죄를 적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앞으로 볼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보다 더 어린 사람들이 많을텐데, 나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 그렇게 갑과 을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면 나의 갑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남을 것이고, 내 생각과 달라도 활력을 줄 수 있거나 많은 면을 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렸을 적의 나와 비슷한 누군가도 상처를 받고, 계속 그렇게 같은 장면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떠올렸다. 바로 그냥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것이다. 나름대로 지키려고 하고 있는데 또 한 번 어긴 것 같긴하다. 또 내 마음대로 내 답을 한참 계속 말해 버렸더니 상대방은 말할 거리가 없어진 것 같아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심해 놓고도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정말 나에게서 특별히 대답을 원하지 않는 경우 최선을 다해 지켜보려고 한다. 


남자들도 그렇겠지만 일반적인 여자들의 경우 궁극적으로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대화의 메인테마가 된다. 여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고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것을 어떻게 택할 지 몰라서가 아니라 답을 아는데 확신을 원하거나 혹은 모르는 척하고 싶어서 인 것이다. 예를 들어 검은색 가방과 노란색 가방을 놓고 고민이라고 얘기했을 때, 평소에 계속 메고 다니려면 검은색 가방이 좋으니 사라고 얘기했더니 '그래도 봄에는 노란색 가방이지'라고 얘기한다면 지금 마음속으로는 노란색 가방을 사고 싶은데 현실적으로는 노란색 가방을 사고 싶지만 검은색 가방이 실제로 들고 다니려면 더 맞을 것 같아서 망설인다는 마음 속 답이 있다. 나는 고민이라는 것이 생기는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답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고민이라는 틀을 꾸며놓고 아닌 척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로 갈 길을 전혀 몰라 헤매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대부분의 경우 그냥 듣고만 있어도 된다. 대부분의 고민들은 정말 고민이어서가 아니라, 압력밥솥에서 김을 세게 내보내고 밥이 되는 것처럼 바깥으로 내보내야 내 마음의 안정을 찾을 것 같아서 그런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A/B 역할 따져가며 예를 모두 들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고민이라는 것은 누군가 털어놓을 대상이, 들어주기만 해도 얘기하면서 스스로가 답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출동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도와줘요' 외치고 싶은 마음 속의 119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까지 읽고도 누군가에게 참견하는 것이 참견이 아니라 '조언'이란 것으로 자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듣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조언을 바로 '참견'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리고 아무리 적절한 조언을 주었다고 할 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민 이전에 답을 가지고 물어보기 때문에 어차피 그 조언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래서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까지 그저 기다려줬다가 나중에 얘기하면 그 때 얘기해주는 것이 좋다. 


이렇게 다 써놓고 생각이 드는 것이, 어쩌면 내가 상대방에게 답을 제시하는 것이 그럴듯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인정 욕구에 치우쳐서 그랬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것이 내 마음에 안정이 아직 더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인데,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는 일방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단단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되든 안 되든 답을 주려는 생각없이, 옳다/그르다는 생각없이 그저 듣는 것을 노력해볼 작정이다.


나름대로의 힘듦이 있을 것 같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100% 부담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편안한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불편하지는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이 글을 한참 지나서 보게 됐을 때 이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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